성서대학

44. 페르시아 총독 느헤미야

2016.09.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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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1-3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느헤미야는 유대인으로서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라는 비교적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의 수산궁에서 고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으며 많은 동족들이 큰 환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거대한 제국 중심부에서의 핵심 관직을 버리고 유다지역 총독이 될 것을 자청하여 유다로 돌아와 성벽 재건사업을 벌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동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 느헤미야의 행적이 칭송받아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시대에 조선사람 중 한 사람이 일본총독으로 부임하였더라면, 설령 그가 우리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잘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아무리 정치를 잘했더라도 그를 따라다닐 평가는 ‘일본 사람 앞잡이’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페르시아에게 협조하여 그 곳에서 관직에 있었고 페르시아의 총독으로 유다에 부임한 느헤미야에 대해 그의 개혁의 성과를 인정하며 호평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들은 유다의 역사평가는, 과정은 어떻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인정하는, 결과를 중시하는 역사라 단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다의 역사를 ‘결과를 중시하는 역사’라 보는 관점은 유다의 역사에 대해 피상적인 관찰이 불러온 오해이며 이 문제 역시 페르시아 시대의 배경을 살펴 본다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유다 땅으로 귀환한 때는 대략 주전 445년경으로 유다가 멸망한 지 140년이 지난 페르시아 시대이다. 이 당시 유다 백성들은 100년이 넘은 식민지 생활과 최강대국 바벨론과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통치를 받으며 정치적 공동체로 회복하는 꿈을 버리고 종교적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생존을 휘한 마지막 시도를 하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역사 평가의 기준은 그가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지의 문제였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협조하고 있는지는 관심 밖의 문제였다. 그래서 역사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페르시아 총독 느헤미야를 평가할 때 페르시아에 협조하는 문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던 느헤미야를 크게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치적 공동체의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던 시기에 독립이 되었기 때문에 만일 ‘일본 총독 김00’하면 아주 어색하게 들리겠지만 ‘페르시아 총독 느헤미야’라는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