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59. 므깃도 아마겟돈

2016.09.1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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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3: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유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고 철저한 종교개혁을 통하여 하나님께 큰 칭찬을 받았던 요시야왕은 그의 종교개혁의 뿌리를 철저한 반앗시리아 정책에 두었다. 왜냐하면 앗시리아는 오랫동안 유다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많은 조공을 요구하여 유다의 경제를 피폐시킨 나라였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수록 빈번한 문화, 종교 교류로 말미암아 유다는 더욱 우상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발홍으로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철저한 반앗시리아 정책을 폈으며, 앗시리아의 우상 훼파를 시작으로 신명기의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중, 요시야는 이집트가 앗시리아를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유다의 원수를 도우려는 것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항전을 벌이다 안타깝게 그 곳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유다의 역사는 빠르게 멸망의 궤도로 들어서게 되었다.

요시야의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므깃도는 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왜냐하면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곡창지대인 이스르엘(Jezreel)평야의 관문으로, 이 곳을 차지하는 사람이 이스르엘 평원 지대를 차지할 수 있는 중요성 때문에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전쟁이 있어 왔다. 또한 므깃도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집트 혹은 메소포타미아로 진출을 원하는 제국의 군대들은 항상 므깃도를 지나 진군하였다. 최근에는 세계 제1차대전 때(1918) 연합군 사령관인 영국의 알렌비 장군이 므깃도를 장악하여 대 터키 작전기지로 삼고 치열한 혈전 끝에 오스만 터키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므깃도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터키의 속령이였던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령(1922)이 되게 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치열한 전투의 대명사로 ‘백마고지 전투’를 생각하듯이 그들은 ‘므깃도’를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신약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기자인 사도 요한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종말을 가져올 최후의 전쟁장소를 ‘아마겟돈(Amageddon)’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므깃도 산’의 히브리어 표현인 “하르므깃도(Har Megiddo)”를 헬라어로 옮겨 적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계 제1차대전 연합군 전투의 승리자인 알렌비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대가로 ‘아마겟돈의 승리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이 사용한 ‘아마겟돈’의 의미는 선과 악의 최후의 결전장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최후 전투의 대명사인 ‘아마겟돈(므깃도)’을 사용한 것이지 ‘아마겟돈’자체가 신비적인 제3의 장소는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