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24. 히스기야 재위 연대 문제

2016.09.14 18:51

관리자 조회 수:9843

왕하 18:1-2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열왕기하에 나타난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 자료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왕이 될 당시는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 3년이며(왕하 18:1), 아시리아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포위한 때는 히스기야 4년(왕하 18:9)이고 사마리아 성이 함락된 때는 히스기야 6년(왕하 18:10), 아시리아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할 때는 히스기야 14년(왕하 18:13)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연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즉,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이 멸망한 것은 주전 722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연대를 근거로 한다면 히스기야 6년이 주전 722년이 되고 산헤립의 침공은 주전 714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산헤립은 주전 704년에서 680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사람으로 그가 유대를 침공한 것은 주전 701년이기 때문에 열왕기하의 역사 기록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하여 히스기야의 재위 연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 결론이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방향은 열왕기상 18장 1절과 3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히스기야의 왕위 등극 연대를 주전 727년으로 보고 그의 재위 6년에 사마리아가 멸망했으며(722 B.C) 주전 698년까지 왕위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우선 히스기야 왕 14년에 침공했다는 아시리아 산헤립의 침공 연대가 열왕기하 역사의 근거에 의하면 주전 714년이 되지만 산헤립의 재위 연대(705-681 B.C)와 주전 701년에 제3차 원정을 감행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처럼 죄수로 잡아 놓았다는 산헤립의 비문을 근거했을 때 연대상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히스기야 재위 연도에 대한 두 번째 방향의 해석은 비교적 정확한 연대라고 할 수 있는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연대인 주전 701년을 기준으로 하여(히스기야 14년) 그의 왕위 등극 연대를 주전 715년으로 보고 있고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하고(왕하 18:2) 구스 왕 디르하가의 연대와의 관계(왕하 19:9)를 고려하여 그의 재위 기간을 주전 715-687년으로 보고 있는 견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열왕기하 18:3의 사마리아 멸망 연대와 일치하지 않는 오류가 있으며 이렇게 재위 연대를 확정하지 못할 경우 므낫세의 재위 기간은 신명기 역사의 보도와 같이 55년이 아니라(왕하 21:1) 45년으로(687-642 B.C ) 축소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히스기야의 재위 연대는 열왕기하와 고대근동 자료의 충돌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서점에 나와 있는 많은 이스라엘 역사서에서는 명쾌한 문제해결이 없이 대개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하나의 견해를 택하여 히스기야 연대를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