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왕하 25:8-1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는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다 사로잡아가고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신바벨로니아 제국은 오랜 기간 동안 앗시리아의 속국으로 있다가 주전 627년 마침내 독립하게 된다. 제국의 창시자인 나보폴라살(627-605 B.C)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느브갓네살(605-562 B.C)은 유다의 멸망과 직접 관련이 있는 왕으로 수많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바벨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구약성서에서 역사서 이외에 다니엘서에서 다니엘과 함께 활동한 동시대 인물로 등장하여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느낌을 주는 인물인 느브갓네살은 고대 제국의 영웅으로 큰 능력을 소유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느브갓네살은 전투 이외에도 다방면에서 재능을 나타냈다. 우선 건축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남부 바벨론의 신전을 재건하였으며, 성벽의 건축, 수메르의 왕궁재건, 이스타르의 문, 에테메닌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벨론의 법률, 문학, 종교 등을 번성시켰고 신바벨로니아 제국을 여러면에서 1000여년전 고대 바벨론 제국과 견줄만 하게끔 역동성을 가지게 하였다.

이러한 느브갓네살의 제국정책은 그의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비문에서는 “편만하게 퍼진 백성들”혹은 “아래바다에서 위 바다까지”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여 바벨론이 모든 나라의 중심이며 모든 백성들은 그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느브갓네살의 눈에는 유다 역시 바벨론의 제국정책에 포함된 일부의 국가, 다시말해 “편만하게 퍼진 백성들”중의 하나였고, 그 와중에 일어난 유다의 친이집트적인 성향이나 바벨론에 대한 조공 중단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바벨론을 지향하며 지중해 지역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는 느브갓네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유다는 멸망이라는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느브갓네살의 비문을 통하여 바벨론이 앗시리아와 같이 교차이주정책을 실시하지 아니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느브갓네살의 비문에 의하면 바벨론이 유다를 비롯한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이유에 대해 “세계의 중심으로서 바벨론”을 지향하며 모든 것을 바벨론을 향해 보내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느브갓네살은 그의 제국정책에서 일관되게 앗시리아적인 요소를 회피하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인이 즐겨쓰던 정복민에 대해 교차이주정책을 추진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구약성서는 느브갓네살의 제국정책을 역사서인 열왕기하를 통해 보도하고 있는데 느브갓네살의 팽창정책 속에서 당연히 초래되는 유다의 국가적 위기, 다시말해 여호야긴시절의 제1차 포로(597 B.C), 왕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던 시드기야 시절의 제2차 포로(587 B.C)등의 사건을 약소국의 비애와 무서운 대제국 바벨론의 팽창정책의 여운을 간직한 채 보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