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22. 오므리 왕에 대한 평가

2016.09.1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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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상 12:25-26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 왕조로 분열된 이후 남쪽유다에서는 21명의 왕이, 북 이스라엘에서는 19명의 왕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행적은 구약성서의 열왕기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각 왕에대한 평가는 소수의 칭찬받은 왕과 다수의 책망받은 왕, 그리고 성서에서 그의 행적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열왕기서에서 하나님께 극찬을 받은 왕으로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왕과 히스기야 왕을 들 수 있으며 반대로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받은 사람은 방방곡곡 우상숭배의 소굴로 만들었던 북쪽의 아합, 남쪽의 므낫세 왕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중 오므리 왕이 누구인지 그가 어디서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존재로서 성서의 한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오므리가 다스리던 12년의 기간 동안,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그 세력은 지중해와 요단 동편까지 확대된 북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오므리 당시의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정치적 업적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호황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외교적으로도 정략결혼을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켰고,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시기였다. 성서 이외의 고대 근동지역 여러 나라들의 문서에서 오므리라는 이름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대 왕 중 가장 쉽게 발견되고 있는 이름이다. 오므리가 죽은 수십년 후에도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왕으로 오므리를 기억하고 있는 앗시리아의 기록을 참고할 때 고대근동 세계에서 떨쳤던 그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열왕기서에는 오므리의 업적에 대해 수도르 ㄹ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긴 것 하나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 그외 그의 커다란 공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열왕기서에서 오므리는 단지 악한 왕이며, 그가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 왕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신상을 세우고 섬겼던 잘못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있다. 이렇게 객관적인 역사 기록이라면 국가를 번영시킨 왕이라고 칭찬받을 오므리를 열왕기서에서 무섭게 책망하고 있는 이유는 열왕기서가 신명기 신학을 근거로 역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신학은 유일신을 강조하고, 중앙성소를 지키며 모든 가나안적 요소를 부정하지만 이스라엘 끼리는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즉 열왕기서의 기자는 이러한 신명기 신학을 그의 역사에 적용하여 평가하고 있는데 객관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쌓은 오므리 왕이라 할지라도 중앙성소를 지키지 않았고, 북이스라엘을 외국과의 정략결혼(그의 아들 아합과 시돈 공주 이세벨의 결혼)을 통해 우상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역사 평가기준에 의하면 책망받을 수 밖에 없는 왕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므리에 대한 열왕기서의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가 세상의 평가와 다르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