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43. 에스라의 활동

2016.09.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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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9:2-3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서를 읽을 때 대락 두 가지 사실을 오해하고 있다. 첫 번째 오해는 에스라서 자체가 에스라라는 예언자의 예언을 기록한 예언서가 아닌가 하는 오해이다. 두 번째 오해는 에스라 1-6장에 기록된 제 2성전의 건축과정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에스라를 예언자 학개, 스가랴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는 성서의 배경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성서를 읽어 나갈 때 생기는 필연적인 문제로 에스라 역시 그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오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라는 강대국 페르시아가 유다를 다스리던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아닥사스다와 7년(주전 458년)에 유다로 귀환하여 위기의 역사에 대응했던 사람으로 그의 직업은 제사장 겸 서기관이었다. 에스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에스라서는 예언서가 아닌 역사서로서 역대상 · 하와 느헤미야를 포함한 4권의 역대기 역사서 중 하나로 페르시아 시대의 위기에 대응한 대표적인 책으로 분류되고 있다.

페르시아 시대 유대공동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회복이 불가능한 정치공동체 대신 종교공동체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제였으며 아울러 그들의 순수혈통 유지문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역대기 역사서에 속해 있는 에스라 역시 이러한 공동체의 위기에 대응한 에스라의 행적을 역사서의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에스라서는 에스라의 행적을 소개하기 전 역대하의 마지막 기록인 고레스 왕의 칙령(주전 539년) 발표에 이어서 1-6장에 걸쳐 학개, 스가랴가 활동했던 제 2성전 건축(515년) 시대의 역사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는 역대하에서 이어지는 역사의 서술이지 에스라가 제 2성전 건축시대에 활동한 사람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시대의 유대공동체를 향하여 귀환한 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예루살렘 수문앞 광장에서 선포함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을 중심에 둔 ‘종교 공동체’ 회복을 선언하였다. 또한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백성들의 ‘혼혈결혼’ 문제였다. 에스라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민족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혼혈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고 한동안 넋이 빠져 앉아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 직면한 에스라는 우선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혼혈 결혼을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재발방지 서약을 하게 한다. 그 뒤 이미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방인 아내를 내쫓을 것을 아울러 서약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속죄제를 드리게 함으로써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에스라의 행적은 역사서에서 제사장 겸 서기관으로서 그의 시대에 닥쳐 온 위기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했다고 평가받고 있다.